어둠 속의 희망

이 책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보여준 ‘희망’에 대한 근거 있는 믿음에 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어둠 속의 희망”이란 표제는 이 책 전반을 요약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얼마 전 이 책의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제가 여기서 기록한 쪽수는 초판 기준입니다. 개정판에 꽤 많은 부분이 추가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대조하여 확인하지는 못했네요.

희망에 대한 말들.

17쪽
이런 변화들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미래에, 당신의 욕망에, 열린 가슴과 불확실성이 암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에, 희망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다.

26-27쪽
스콧 피츠제럴드는 “일급 지능을 갖고 있는지 시험하는 방법은 상반된 두 생각을 동시에 마음에 품으면서도 제구실을 할 수 있는가 보는 것이다.”라는 멋진 말을 했다. (…) 피츠제럴드의 잊힌 그다음 문장은 이렇다. “예컨대 우리는 상황이 희망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상황을 바꾸려는 단호한 결심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106쪽
내 친구 제이므 코테즈는 내게 희망과 신념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희망이 증거에, 가능한 것에 관한 세부기록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이 말들은 위안이 됩니다.

127쪽
우리는 모든 참화를 영원히 막을 수는 없지만 참화를 줄이고 불법화하고 그 원천과 기초를 막고 허물 수는 있다. 이런 것들이 승리다.

64-65쪽
내가 태어날 당시 세상에는 상환청구권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고, 인종차별적 조사행위(racial profiling), 증오범죄, 가정폭력, 성희롱, 동성애 혐오 및 기타 배제와 억압의 형태들을 나타내는 단어조차 없었다.

128쪽
승리는 대개 일시적이거나 미완성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흠을 지니기 마련이므로 그런 승리도 어쩌다 얻게 되는 놀라운 승리 못지않게 축하해야 옳다. (…) “유토피아는 지평선에 걸려 있다”고 갈레아노는 선언했다. “내가 두 걸음 다가가면 유토피아는 두 걸음 물러난다. 내가 열 걸음 다가가면 그것은 열 걸음 더 멀어진다. 유토피아가 왜 있는가? 이것, 즉 걷기를 위해 있다.”

47쪽
기쁨은 운동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지탱해준다.

저자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소소한 승리 역시 축하해야 하며, 소소한 것 같은 일도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50-51쪽
물론 이것은 다른 모든 변화를 수반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매우 추적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정치가 생각의 확산과 상상의 형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상징적-문화적 행위가 실제적인 정치적 힘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 다시 말해 혁명은 반드시 혁명 같아 보일 필요는 없다. (…) 폭력이 국가의 힘이라면 상상력과 비폭력은 시민사회의 힘이다.

68쪽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노예제 폐지론자들, 똘스또이, 여성참정권 운동가들, 간디, 마틴 루터 킹,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 세기 이상에 걸쳐 빚어낸 시민불복종과 비폭력의 원칙은 장차 세계 모든 곳에서 해방의 표준적 도구가 되는데, 이 과정이 그리는 궤도 또한 의표를 찌른다. 원자폭탄이 20세기 최악의 발명이라면, 시민불복종과 비폭력은 원자폭탄의 안티테제이면서 20세기 최고의 발명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막연한 절망부터 할 이유가 없습니다.

63쪽
언제나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곧잘 상상하는데, 그런 종말을 그려보는 것은 종말이 없는 세상에 이어지는 변화의 기이한 곁길들을 그려보는 것보다 한결 쉽다.

완벽함을 추구할 이유도 없습니다.

126쪽
완벽은 가능성을 두들겨 패는 막대기다. 완벽주의자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흠을 잡는 능력이 있고, 이런 면에서라면 좌파보다 더 높은 기준을 지닌 이들은 없다.

130쪽
그러나 낙원의 꿈이 일단 현실이 되기 시작하면 그것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리하여 낙원의 통치자들은 에덴동산 한쪽에 강제수용소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저는 “본질적 불가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불확실성 위에 세워진 세계니까요.

159쪽
그래서 이 또 다른 지구화, 소통과 구상의 지구화는 체인점과 상표와 기업의 확산이 불러오는 동질화 및 고착화의 안티테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작은 것이 거대한 것에 맞서는 형국일 수도 있다. 아룬다티 로이는 “거대한 것 – 거대한 포탄, 거대한 댐, 거대한 이데올로기, 거대한 모순, 거대한 영웅, 거대한 실수 – 의 해체”를 거론한 다음, “어쩌면 금세기는 작은 것의 세기일는지도 모른다”고 썼다.

단일체적 제도나 기업에 저항하는 최선의 길은 단일체적 운동이 아니라 다중성(MULTIPLICITY) 그 자체다.

174쪽
하지만 희망은 기대와는 다르다. 희망은 세계의 본질적 불가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현재로부터의 단절과 뜻밖의 일들을 감싸 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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