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에 관하여

무척 좋아하는 책입니다. 면역에 관하여.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니 “과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가 되어 있는데, 실은 이러한 분야를 넘나드는 훌륭한 에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에세이라는 말을 저는 제 마음대로, 약간 한정적으로 쓰고 있습니다(건방지지만요). 이를테면 저는 피천득 선생의 수필을 에세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기존 표현에서 굳이 찾아보자면 중수필 정도가 비슷한 뜻일 것 같긴 한데, 딱 들어맞는 느낌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 책은 제 기준에서 에세이입니다.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은 제가 말하려고 하는 에세이란 것이 대략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시겠죠.

별 의미는 없지만, (제 기준에서의)에세이는 저자와 저자가 말하려는 대상과의 거리감에 따라 또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작가는 말하려는 것에 푹 빠져버립니다. 어떤 작가는 말하려는 것으로부터 뚝 떨어져서 관찰합니다. 어떤 작가는 그 경계선에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거리감입니다. 바로 이 책이 그렇습니다.

책의 겉표지를 벗겨보면 그림이 하나 나옵니다. 뭔가를 접종하고 있는 것 같네요. 원서의 표지는 스틱스 강에 아킬레우스를 담그는 모습인 것 같고요.

10쪽
면역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그림은 말하는 듯하다.

왜 이 책은 ‘어머니’가 쓰게 된 것일까요. 왜 어머니가 면역이라는 것, 백신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고민했을까요.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3쪽
아이의 운명이 무엇이든, 내게 그 운명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할 힘은 없다는 걸 나는 똑똑히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림 동화의 나쁜 도박들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17쪽
당시 내가 느끼기로 그것은 내가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예방 접종이 과연 감수할 가치가 있는 위험인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아기 아킬레우스를 스틱스 강에 담갔던 테티스처럼 나도 도박을 감행해야 할까?

108쪽
20세기 심리학자들은 조현병을 자식을 숨 막히게 만드는 고압적인 어머니들 탓으로 돌렸다. 1973년까지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었던 동성애는 자식을 싸고도는 근심 많은 어머니들 탓이라고 했다. 1950년대까지 유력하게 여겨졌던 이론에 따르면, 자폐증은 냉정하고 둔감한 <냉장고 엄마들> 탓이었다. 요즘도 어머니는 <세균론의 빠진 고리로 간편하게> 동원된다는 게 심리 치료사 재나 맬러머드 스미스의 지적이다. 스미스는 <원인이 바이러스도 세균도 아니라면 엄마겠지>라고 비꼬았다.

231쪽
어머니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우리는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순 없는 것처럼, 아이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순 없다.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은유는 이 책의 전반을 흐르는 한 주제입니다. 수전 손택의 글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24쪽
<우리의 몸은 우리의 은유를 결정한다.> 제임스 기어리는 은유를 다룬 책 [나는 타자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은유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 이 행위에서 우리가 읽어 내는 은유는 압도적으로 두려운 것들, 거의 늘 침해와 타락과 오염을 암시하는 것들이다.

27쪽
요즘의 백신은 매사가 제대로일 경우 무균 상태다. 어떤 백신에는 세균 증식을 막기 위한 보존제가 들어 있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백신에서 걱정하는 건 활동가 제니 매카시의 말마따나 <끔찍한 수은, 에테르, 알루미늄, 부동액>이다. 오늘날 마녀의 묘약은 화학적이다.(…)
뱀파이어의 섬뜩한 섹슈얼리티는 백신 접종 행위에 뭔가 성적인 면이 있을 거라는 두려움을 부추겼고, 그 불안은 팔에서 팔로 전달하는 백신 때문에 성 매개 감염병이 퍼졌을 때 더더욱 강화되었다.

28쪽
드라큐라가 유달리 무서운 존재인 것, 그리고 그 이야기의 플롯이 해결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그가 괴물성을 전염시키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43쪽
수전 손택은 <위험군>이라는 개념이 <질병이 타락한 공동체를 심판해 왔다는 낡아 빠진 생각을 되살린다>고 말했다.

86쪽
사람들이 접종이라는 단어로 처음 종두를 묘사했을 때, 그것은 질병을 접붙이는 행위에 대한 은유였다. 그리고 그 질병은 몸이라는 밑나무에서 나름의 열매를 맺을 것이었다.

208-209쪽
에이즈 전염병의 시대에 성장한 우리는 에이즈가 동성애, 난잡한 성생활, 약물 중독에 대한 벌이라는 생각을 접하며 살아 왔다. 그러나 질병이 정말로 무언가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데 대한 벌일 뿐이다.

193쪽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유명한 말이다. 진부한 은유는 진부한 생각을 낳는다. 뒤섞인 은유는 혼란을 낳는다. 그리고 은유는 쌍방향으로 흐른다. (…) 만일 우리가 느끼는 신체적 취약성의 감각이 정치를 오염시킨다면, 거꾸로 정치적 무력함의 감각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뭔가 알려 줄 것이다.

면역에 대한 이런 표현들은 정말로 훌륭합니다.

34-35쪽
백신 접종을 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썩 괜찮을 것이다. 그 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집단 면역 때문이다.

36쪽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

웨이크필드의 사례는 유명합니다. 지금도 백신-자폐증 이야기가 돌고 있으니, 떠도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108-109쪽
1998년, 영국 소화기 의사 앤드루 웨이크필드는 어머니들이 아니라 제약 회사들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지금은 철회되었으나 당시 [랜싯]에 실렸던 그의 논문은 12명의 아이를 사례 조사한 것이었고, 홍보 비디오와 기자 회견이 수반되었다. 그것을 통해서 웨이크필드는 이미 백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믿고 있던 부모들의 의혹을 지지했다.

110쪽
확정적이지 못한 웨이크필드의 연구를 가져다가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데 썼던 사람들의 죄는 무지나 과학 부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전부터 우리가 허술한 과학을 이용해 왔던 방식대로, 즉 다른 이유에서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생각에 거짓 신뢰성을 부여하는 용도로 과학을 이용한 죄였다.

저자는 과학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것의 핵심이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습니다.

111쪽
해러웨이는 우리에게는 과학이 필요하다고 경고한다. 사회적 지배를 바탕에 깐 게 아닌 한, 과학은 해방적일 수 있다.

213쪽
작가 마리아 포포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미디어 문화는 과학적 이해의 씨앗을 왜곡시킴으로써 비만 유전자나 언어 유전자 혹은 동성애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선정적이고 단정적인 기사 제목으로 바꿔 내고, 사랑이나 공포나 제인 오스틴을 감상하는 자질이 뇌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알려 주는 뇌 지도를 그려 낸다. 과학의 원동력은 답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순수함이란, 독립성이란 환상.

117쪽
순수함, 특히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사악한 사회 활동들 중 다수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열정은 맹인이거나 흑인이거나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118쪽
우리는 세균으로 우글거리는 존재이고, 화학 물질로 포화된 존재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물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과도.

188쪽
여동생은 이렇게 제안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 우리 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몸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이 대목에서 동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요컨대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한단 거야.”

이것은 개인적으로 겪었던 일이 떠올라 붙여봅니다. 저는 “면역 마초”라는 말에서 웃고 말았습니다.

207쪽
<면역계는 새로 태어난 사회 다윈주의의 핵심으로서, 서로 다른 <<특질>>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구분하게끔 해주는 기준이 된 걸까?> 인류학자 에밀리 마틴은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답이 <그렇다>일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녀가 조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면역 마초> 같은 태도를 보였다. 가령 자기 면역계가 <끝내준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제가 이 책을 좋아했던 이유는 훨씬 더 많습니다. 과학적인 사실을 쉽게 설명하는 부분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너무 길어지고 있어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마지막입니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248쪽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