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은 강간이다

이 책은 조용히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매대에서 내려갔습니다. 부당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래 읽었던 책 중 이 정도로 중요하다 느낀 책은 많지 않았습니다. 강간 등 성범죄 대다수는 친고죄였습니다. 비친고죄로 바뀐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는 진작 비친고죄가 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친고죄는 범인을 알게 된 날로부터 6개월이 경과하면 고소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친고죄의 고소를 취하하면 가해자는 벌을 받지 않습니다. “합의하면 처벌받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면 범죄를 줄이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이견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고소를 취하하거나 합의해도 기소유예 되거나 양형요소가 될 뿐입니다. 만약 ‘죄를 지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처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책에 대한 제 의견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보다는 이 책의 내용 전부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곤란하겠고(안타까운 일입니다) 몇 부분만 인용하되 다소 길게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강간은 강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기사에서 강간 대신 “성폭행”이라는 완곡어를 자주 써왔습니다. 저는 이런 시도에 부정적입니다. 성폭행, 성폭력, 성추행 과 같은 단어들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혼동합니다. 뭔가 성과 관련된 일이 있었겠지 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290쪽
완곡어법을 쓰지 않는 것도 대중에게 강간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 강간은 “미성년자와 섹스를 하는 것” 또는 “합의되지 않은 섹스”가 아니다. 이런 에두른 표현은 강간에 관련된 폭력이나 모욕을 은폐한다. 강간은 강간일 뿐이다.

무고는 중죄입니다. 그러나 유독 성범죄에 대한 무고는 과장되어 있습니다. 무고는 모든 범죄에서나 나타납니다.

9쪽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면식 강간 신고 건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검찰, 판사, 배심원이 면식 강간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일수록, 여성들이 강간당했다고 거짓으로 주장한다며 떠드는 사람도 늘고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불협화음이 크고 격렬해진 시기는 강간 연구자들이 정부 지원을 받아 시행한 연구에서 미국의 면식강간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때와 거의 일치한다.

176쪽
FBI가 매년 정부 기관에 제공하는 무혐의 사건 기록에 관한 미발표 자료를 보면 강간 신고의 무혐의 처리 비율은 감소하는 추세임이 드러난다. 1996년에는 신고된 강간 중 7.4퍼센트가 무혐의로 보고된 반면 2008년에는 그 수치가 5.8퍼센트로 줄어들었으며, 이는 2001년과 비슷한 비율이다. 무혐의 범주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허위 신고보다 많은 사건이 포함되므로, 허위 신고비율은 5.7퍼센트보다 낮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강간 신고율은 높지 않습니다. 이것은 피해자의 말에 일단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가해자의 대다수는 면식범이며, 이것이 사건을 어렵게 만듭니다.

135-136쪽
첫 번째 연구에서 킬패트릭은 무작위로 전화를 거는 방식으로 18세 이상 미국 여성 4008명을 인터뷰했다. 폭력적 삽입이라는 보수적 정의를 적용해 집계한 평생 강간 출현율은 13퍼센트(피해자 수로 환산하면 1210만 명)였고, 연구 당시를 기준으로 1년 이내에 폭력적 강간을 겪은 여성은 0.7퍼센트(68만3000명)였다. 한편 경찰에 강간을 알렸다고 답한 여성은 16퍼센트에 불과했다.

142-143쪽
2006년 킬패트릭의 일반 집단 표본 조사에서 밝혀지고 CDC연구로 뒷받침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낯선 사람이 강간을 저지른 사례는 전체의 11퍼센트에 불과하다. 가해자의 14퍼센트는 남자친구, 10퍼센트는 남편 또는 전 남편, 12퍼센트는 친구, 11퍼센트는 양아버지, 18퍼센트는 기타 친척이었다. 이보다 10년 앞서 이루어진 주요 연구에서는 강간당했다고 응답한 여성 중 16.7퍼센트만이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답했다.

우리는 피해자의 말을 잘 믿지 않습니다.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132쪽
대니엘과 섀의 사례는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여성들이 겪는 불신을 잘 보여준다. 대니엘의 룸메이트는 자기 나름의 이유로 대니엘의 말을 믿지 않는 쪽을 택했다. 섀도 자신이 강간당하기 전까지는 다른 여자들이 강간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음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피해자를 믿지 않는 쪽이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해자의 행실에서 잘못된 점부터 찾으려고 합니다.

101쪽
또,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 여성은 대체로 스스로 섹스를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데 상당한 수의 대중이 동의한다는 점도 명백하다. 이러한 믿음은 비슷한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의 유죄 판결에 큰 걸림돌이 된다. 2010년 영국에서 시행된 온라인 설문에서 응답자의 3분의 1은 도발적인 옷차림을 했거나 가해자의 집에 술을 마시러 갔다면 폭행은 피해자의 탓이라고 답했다.

109쪽
원고는 배심원단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며 남자와의 성관계에 동의했을 리 없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배심원은 여성이 차에 탔으므로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간에 모두 동의한 것으로 보고 그런 평결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193쪽
데이비드 리잭은 강간당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취약함은 우리를 마음 깊이 두렵게 한다. 자신의 몸이 다른 인간에 의해 강제로 꿰뚫린다는 것은 끔찍할 만큼 철저히 취약하고 무력한 느낌을 주는 경험이기에 대다수 사람은 생각만으로도 움츠러들고 만다. 그런 거부감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그 경험에, 그리고 그 일일 겪은 사람에게 감정이입한다는 것은 깊은 공감 능력과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솔직히 그런 어려운 일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 허위 신고 문제가 뿌리를 내린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최적화된 토양 때문이다. 같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강간 피해자를 피하거나 한시바삐 치워버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낄 때, 그 여성이 모든 것을 지어냈다는 억측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다. (…)”

취약한 사람을 찾아내는 눈.

143-144쪽
특정 전략을 동원해 피해자를 노리는 상습 강간범이 존재한다는 흥미로운 결론을 보여주는 연구 두 가지가 있다. (…) 결과가 실제보다 더 낮게 나왔을 것이 분명함에도(연구자에게 강간을 인정하지 않은 응답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 표본의 4퍼센트에 달하는 120명의 남학생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가운데 63.3퍼센트(76명)가 강간을 반복했다고 답했으며, 강간 건수는 총 483건으로 개인 평균 5회라는 계산이 나온다. 연구자들은 이 청년들이 어떻게 기소를 피했는지 의문을 표했다.

해답은 부분적으로 이들의 피해자 선택과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폭력을 자제하는 성향에 있는 듯하다. 자신의 사회 연결망 안에 있는 여성, 즉 면식 있는 지인을 노리고 신체적 상해를 초래할 수 있는 종류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 남성들은 여성들이 신고할 가능성이 거의 없고 검찰이 기소할 가능성도 비교적 낮은 ‘사건’을 만들어낸다.

발전하는 범죄자들.

265-266쪽
전직 카운티 검사보 비비언 킹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여성들은] 기소를 원하지 않았어요. 남들에게 알려지는 게 싫다고 했죠. 사건 기록을 시간 순으로 놓고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성폭행을 할 때마다 그가 발전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어요. 처음에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데다 상처를 남기는 방식을 썼지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갈 때마다 더 능란하고 똑똑해졌죠. 그는 부상을 남기지 않고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힘을 행사하는 법을 배웠어요. 이번에 잡지 못하면 다음번에 그가 강간을 저지를 때는 기소조차 못 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죠. 거의 확신할 수 있었어요. (…)”

강간 부정론자들은 인터넷 매체의 힘을 빌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160-161쪽
늦은 오후가 되자 ‘FalseRapeArchivist’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용자가 로그인해 제대로 된 연구에서는 허위 강간 신고율이 모두 50퍼센트로 나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

이 특정한 강간 부정론자들은 강간 신고의 50퍼센트가 허위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거로 이들은 퍼듀대학교 교수 유진 J. 캐닌의 1994년 연구 보고서를 인용한다. 하지만 더 최근에 이 연구보다 나은 방법을 활용해 허위 강간 신고율이 2-8퍼센트라는 사실을 밝혀낸 일곱 건의 연구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의 ‘ 허위 강간 신고 추방 운동’은 ‘강간에 대한 거짓말’이라는 새로운 사회 문제가 존재한다고 언론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 책은 정말 여러 방면에서 생각할 부분을 많이 남깁니다. 제가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책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많은 분들이 읽고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조금 더 나아갈 차례입니다.

169쪽
연구자 잭 조던은 자신의 책 [여자가 한 말 : 경찰, 강간, 그리고 믿음]에서 흥미로운 모순을 지적했다. “여자가 남자의 범죄를 고발하면 사람들은 여자를 의심하지만, 고발을 철회하면 그녀를 믿어준다. 학대를 당했다는 여성의 말은 의심스럽지만, 학대 신고를 철회하면 갑자기 여성의 말은 신뢰도가 높아진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여성의 말은 남성을 여성에 대한 폭력의 책임에서 면제하고 사면해줄 때만 믿을 만한 것이 되는가?”

295쪽
과거에 강간 피해자 지지자들은 피해자가 강간을 신고하지 않겠다고 하면 항상 그 결정을 존중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을 탓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피해자들은 의도치 않게 강간 부정에 기여하는 셈이 된다. (…) 그러므로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다는 피해자의 뜻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이 자책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도록 장려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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