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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이 책은 이미지를 읽는 방법에 대한 것이지만, 아무 준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해도 충분히 좋은 책이라 생각합니다. 문장이 좋고 잘 읽힐 뿐만 아니라(번역본을 읽은 것이니 문장이 좋다는 말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애초에 좋은 문장이어야 좋은 번역문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배경지식도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BBC TV 강의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하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강의를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강의록이라는 것이 강의를 할 때에는 그럴싸해 보여도 정말 괜찮은 글이 되기는 힘들다는 것을요.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는 전통적인 해석들에 의존하는 대신, 다르게 직접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특히 누드화-유화 부분에서 많이 감탄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봅니다.

10쪽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11쪽
우리는 결코 한 가지 물건만 보지 않는다. 언재나 물건들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우리의 시각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둥그런 시야 안에 들어온 물건들을 훑어보며, 세계 속에 우리가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려 한다.

왜 ‘어떤’ 작품은 신비롭게 되었는가. 그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29쪽
그 소묘는 방탄 유리장 안에 놓여 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감동을 주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는데, 이는 그 이미지가 보여 주는 것, 그 이미지가 지닌 의미 때문이 아니다. 그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시장가격 때문이다.

30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관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물로 가득 차 있음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 신비감이란 사실 헤아릴 수 없는 부이다.

존 버거의 젠더의식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시선에 대한 책을 쓴 이에게 이 정도 의식도 없으리라 생각하긴 어렵죠.

53쪽
결국 문제시되기만 했을 뿐 아직도 말끔하게 청산되거나 극복되었다고 할 수 없는 오래된 관습이나 관행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여자의 존재는 남자의 경우와는 다르다.

54쪽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 다닌다.

55쪽
만약 한 여자가 마룻바닥에 유리잔을 내동댕이치면, 이는 그 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예시가 된다. 동시에 이런 행동은 그 여자가 타인들에게 어떻게 대접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려 주는 표지인 것이다. 만약 남자가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면 그의 행동은 분노의 표현으로만 읽힐 뿐이다.

56쪽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이제 누드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존 버거의 말을 따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60-61쪽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62쪽
하지만 벌거벗은 몸은 그윈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소유한 사람(즉 여인과 그림 둘 다를 소유한 사람)의 감정 혹은 욕구에 복종한다는 표시인 것이다.

63쪽
분명한 사실은 누드가 언제나 관습에 의해 정해지며, 이러한 관습의 권위는 특정한 미술 전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64쪽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 누드는 절대로 벌거벗은 몸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74쪽
유럽의 유화에서 누드는 보통 유럽 휴머니즘 정신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이 정신은 개인주의와 분리시킬 수 없다. (…) 그러나 이 누드의 전통은 그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 이 모순은 간단하게 말해 다음과 같다. 한쪽에는 예술가, 사상가, 후원자, 소유주라는 구체적인 개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들의 활동의 대상이 되는 사물 혹은 하나의 추상적인 존재처럼 취급되는 사람, 즉 여성이 있는 것이다.

유화는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라는 것, 그리고 과거 유화는 현대의 광고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습니다.

104쪽
유화를 다른 회화형식과 구분해 주는 것은 묘사되는 대상이 마치 눈 앞에 있어서 실제로 손으로 만질 수도 있는 물건인 것처럼, 그 질감, 광채, 입체감 등을 표현해내는 능력이다. 유화는 실재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규정한다.

156쪽
두말할 것 없이 오늘의 광고 언어와 유화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속성이 있다. 단지 문화적인 품위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이 연속성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이 점 역시 연속성 못지않게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161쪽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인상 깊었던 문장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34쪽
말이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이미지는 이제 문장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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