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선생의 책은 곧잘 찾아 읽는 편이었는데, 정신없이 살다보니 이렇게 놓치는 책이 있습니다. 물론 변명이지만요. 이 책은 저자가 운영했던 “술방”에서 있었던 일, 술방을 운영하며 겪었던 일들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술방이라고 하니 시시한 이야기들만 있을 것 같지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말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날카롭게 가다듬는 것은 결국 경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저자의 말은 강한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자가 공부를 멀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언어는 현실을 설명하기엔 항상 부족하니까요.
59쪽
지금 내게 공부란 끝없는 말 배우기다. 외’국’어가 아닌 타’인’의 말을 배운다. 특히 인권 공부에서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다. 약자이자 타자이면서 어떤 범주로 뭉뚱그릴 수 없는 개별자인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면 이중 삼중의 언어가 필요하다. (…) 능력에 버겁더라도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한다. 공부로 사람 사이를 연결할 말을 만들어보자, 술방의 꿈이다.165쪽
쉬는 게 사치일 뿐 아니라 ‘공부가 뭔 필요야? 현장에서 뛰는 게 최고지’라는 분위기에 공부 또한 사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많은 활동가들은 주머니의 빈곤함보다 관점과 언어의 부족을 힘들어한다. 현장에서 차오른 절절한 느낌을 많이 나누고 전파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
저자는 끊임없이 성찰합니다. 수많은 경험이 사람을 독선으로 이끄는 일이 많다는 걸 생각해보면, 쉬운 일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63쪽
내게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정체성과 불리한 정체성이 고루 있다. 불리할 때는 정의 대 불의의 이분법을 즐겨 쓰고, 불의에 핍박당하는 피해자의 위치에 나를 놓는다. 그럼 유리할 때는? 그냥 구경꾼의 시선을 가지는 것 아닐까? 어느 쪽이든 나를 중심으로 고정석을 배치한 것은 아니었을까? 소수자에 대한 시선을 정하는 자리에 나를 앉히고, 소수자는 나의 시선을 받는 쪽에 두는 것 말이다.83쪽
‘너 도대체 왜 그랬니?’ 나 자신에게 따져 물었다. ‘질문이 두려운 거야. 질문하기가 귀찮아졌다구. 나보다 젊은 세대는 질문을 던지는 자이고, 나는 점점 질문이 귀찮고 두려워져. 그걸 인정하기 싫어.’ 내가 답했다. ‘그래서 훈계와 지시로 대신하려는 거야?’나는 또 물었고 그 물음엔 대답하길 외면했다.
인권운동을 하다보면 항상 타인의 고통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양은 다르겠지만, 저자가 특별히 강한 사람이라서 이렇게 오랜 시간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185쪽
내 수다를 들어주던 K가 물었다. “류는 독립영화는 안 보나요?” “미안하지만 안 봐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서른 넘어서는 사회참여영화는 물론 예술영화니 하는 것조차 안 봐요. 아니 못 봐요. 진지하고 아픈 얘기 자체에 몰두하는 게 힘들어요. 삶 속에 가득한 게 비극인데 영화마저 우울하면 감당할 수가 없어요. 드라마도 해피엔딩이 확실한 것만 골라 마지막 회만 봐요. 극장에도 안 가요. 방 안에서 내 맘대로 중간에 끊을 수 있는 것만 봐요.”226-227쪽
저마다의 국경은 다르겠지만 내 마음속 국경의 철옹성은 ‘무력감’과 ‘공포’다.너무 많은 고통을 아는 것은 무력감을 만든다. 넘어설 만한 고통, 내가 손쓸 수 있는 수준을 넘는 고통 앞에서 드는 생각은 기껏해야 ‘내가 그런 상황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다.(…)
공포는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다. 국제연대를 운운하면 숱한 애국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을 것이 무섭다. (…) ‘지역적이며 동시에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금언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하다.
류은숙 선생의 다음 말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네요. “우선 움직이고야 마는”이란 말을 다시 생각합니다.
251쪽
사회적 약자들뿐만이 아니라 그들 편에 선 쪽도 같이 모욕의 파편을 맞아야 한다. 모욕을 나누는 일이 제일 힘든 연대라 할 것이다. 연대를 구실로 칭찬과 영광을 같이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모욕을 같이하려는 사람은 드물다.227쪽
막막할 때면 우선 ‘움직이고야 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