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글에서 글쓴이의 선함이 느껴지는 경험은 오랜만이었고요. 사회역학이라는 다소 낯선 주제지만, 그 낯섦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전문가가 쓴 전문가를 위한 책이 있을 것이고, 전문가가 쓴 일반인을 위한 책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자는 몰라도 후자가 괜찮은 책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문가는 많은 것을 알지만 일반인들이 얼마나 아는지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저자는 클랩 교수의 “어떤 변호사는 어떤 학자는 그의 편에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같은 말을 듣고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을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저는 말이란 것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8쪽
인터뷰어 : 왜 이런 일을 하나요? 돈 때문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클랩 교수 : 골리앗에 맞서는 것이지요. 법정에서 노동자들은 보통 이길 수 없습니다.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변호사는 어떤 학자는 그의 편에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가 정확한 내용을 정확한 표현으로 잘 전달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2쪽
1966년, 루마니아의 국가원수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낙태금지법을 시행합니다. 그 조치는 루마니아의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기인했습니다. 이라고 불리는 낙태금지법은 강간이나 근친상간을 통한 임신과 의학적으로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임신, 그리고 이미 아이가 4명이 있거나 산모의 나이가 45세 이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낙태를 금지시켰습니다.

33-34쪽
출산율 증가는 일시적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충분한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법을 피하는 길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둘째, 고아원 등의 시설에서 자라나는 아이 수가 증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성 사망비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36쪽
모든 질병과 사고가 그런 것처럼, 의학적으로 위험한 임신 중절 시도로 인한 피해는 역시 가난한 여성들에게 집중됩니다. 가난한 여성들은 피임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받기 어렵고 또한 비용 등의 문제로 피임 수단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부의 정책은 ‘금지’에 치중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60쪽
이 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시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되는 제조업 노동자나 매일 안전장치 없이 추락사의 위협 속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에게 10년 뒤 암 발생 가능성이 높아지니 지금 담배를 끊으라는 충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이는 저소득층이 자신이 처한 열악한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이유로 흡연할 경우,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금연정책은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까지 필요한 근거의 양은, 근거의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요? 얼마나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할까요. 충분한 근거라는 것이 있기는 하는 것일까요.

79-80쪽
마지막 요소는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핑계로 행동을 늦추는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 그것은 공중보건의 핵심 방법론인 역학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의 건강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입니다. 순수과학과 달리 공중보건에서 판단을 미루는 것은 여러 위험 요소로부터 현재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뜻합니다. 적절한 데이터나 과학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핑계나 변명으로, 더 나아가 특정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82쪽
따라서 국가가 아니라 새로운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해 이득을 얻는 기업과 사람들이 그 물질이 유해하지 않다는 점을 사전에 증명해야 하는 ‘사전주의 원칙’에 기초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는 거의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88쪽
저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50.5퍼센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는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표2) 전쟁포로로 잡혔던 경험만큼 정리해고와 공장점거 파업에서 겪은 일들이 인간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는 게 사실인지 혼란스러웠고, 이 숫자가 진짜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 잔인한 숫자가 오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쌍용자동차에서는 2009년 이후 지금까지 29명이 뇌출혈로, 심장마비로, 당뇨 합병증으로 죽어갔습니다.(표3)

95쪽
다음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2009년 정리해고 이후 3년이 지나면 65퍼센트가 생명보험을 해약했고, 83퍼센트가 적금을 해지했습니다.(그림9)

기록이 없다는 것. 이렇게 잊혀지게 두어도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166쪽
한국사회에는 그동안 여러 참사가 있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요. 저는 세월호 생존 학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러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기록이라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

184쪽
얼마 전 일본의 재난 연구자 한 분을 만났다. 일본의 경우, 쓰나미 등 대형 재난을 겪은 지역에는 정부가 여러 지원을 수행하지만, 누구도 그 내용을 입에 올리지 않고 언론도 보도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원 내역을 국민과 공유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도움되는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재난 당사자가 애도하고 치유에 집중하도록 사회가 침묵해야 한다. 그게 한 사회의 감수성이고 실력이다.

188쪽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정부는 갈등을 더 부추겼다. 유가족과 생존 학생 가족을 나누고, 피해자와 국민을 떼어냈다. 우리 사회 역시 그 골을 좁히지 못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안 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196쪽
성소수자들은 이성애자들에 비해 더 아픕니다. 1966년부터 2005년까지 출판된 성소수자들의 정신건강에 대한 28편의 연구를 분석한 한 논문에서, 이성애자에 비해 성소수자의 자살시도 유병률이 2.5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유병률이 1.5배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200쪽
오늘날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학계에서는 상식이 됩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어떤 정신과 학회도, 어떤 정신과 교과서도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하거나 ‘동성애가 질병인지 여부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215쪽
한국은 동성애에 대해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용도를 보이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그림 12) AIDS 환자에 대한 편견은 더욱 심합니다. AIDS 환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비율은 88.1퍼센트로 미국의 6배, 스웨덴의 14배가 넘습니다.(그림13) 저는 동성애와 HIV/AIDS에 대한 이와 같은 거부감이 상당부분 보건학적 무지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223쪽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기존에는 장애disorder로 표현했으나, 이제는 위화감dysphoria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이는 출생 시 법적인 성별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성별이 다른 경우 그 자체로 정신질환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 삶에서 받는 고통과 어려움이 이 차이를 정신장애로 만든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결정입니다.

위안이 되는 말입니다. 저도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219쪽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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