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2018년 3월 5일, 김지은 씨는 당시 충남도지사였던 안희정의 성폭력을 세상에 고발했습니다. 이 책은 그 전후 있었던 일들의 기록입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을 고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수사와 재판 절차 외에도 넘어야 할 벽이 많습니다.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 피해자를 위축시키기 위한 고소,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2차 가해 등. 이 책은 성폭력 피해를 당한 개인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24쪽
선배는 이내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내게 물었다.
“무슨 일 있니? 도와줄 테니 이야기해봐.” 주저했다. 고민하다 결국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수화기에서 적막이 흘렀다. ‘그래. 역시 다 똑같구나. 도와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그런 생각이 스쳐갈 때쯤, 적막을 깨고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게.”

유일하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던 선배도 이렇게까지 긴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미리 알았더라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지 생각을 잠깐 해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야 합니다. 이런 일을 겪은 저자가 또 다른 사람을 도울 생각을 하는 것처럼.

313쪽
활동가의 제안으로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듣기로 결심했다. 교육 접수가 시작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접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수행비서의 일이란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99쪽
지사의 전화는 수행비서에게 모두 착신되어 있다. 그는 전화를 모두 돌려놓았고 개인적으로 통화하고 싶을 때만 직접 착신 전환을 풀어서 자신의 전화기를 사용했다. 한밤중에 오는 전화와 문자도 모두 수행비서가 받는다.

100쪽
미투 이후 나는 “왜 네 번이나 지사의 방에 갔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지만, 그날들은 사적 심부름 때문에 불려 갔던 수백 번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 맥주나 커피, 컵라면, 달걀, 우유, 빵, 잼, 버터, 시리얼, 김치, 속옷, 면도기, 치약, 칫솔, 휴대폰 케이스, 보조 배터리, 충전기 등을 밤낮 상관없이 공관으로, 외부 숙소로, 마포 오피스텔로 가져오라 사 오라 수시로 시켰다.

119쪽
지사는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지 않는다. 수행비서가 전화를 건다. 송신음을 듣다가 전화가 연결되면 귀에 가져다 대드린다. 상대방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에 딱 맞춰 전달해야 한다.

조직은 무척이나 폐쇄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며, 지사는 실제로 힘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말들로는 표현이 부족합니다.

45쪽
실제로 미투 방송 다음 날인 3월 6일에 별정직 비서인 나는 면직되었다. 임면권자가 사임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임면권자인 안희정이 해고를 시키거나 또는 안희정이 직위를 잃는 것만으로도 나의 계약은 그 즉시 해지되는 고용 형태였다.

79쪽
캠프는 단순히 일하는 능력이나 학위 같은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평판을 중요시 여겼다. “누가 그러는데 걔 어떻다더라”라는 평판조회가 비일비재했기에 선배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누군가의 눈 밖에 나면 그것은 곧 커리어의 끝을 의미했다. 조직은 폐쇄적이었다.

106쪽
내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자리와 부름을 피하라고 내게 말했다. 그런 조언을 하는 이들은 내가 회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네가 조심해라”라고 말했다.

107쪽
안희정의 일부 측근들은 모임이 있을 때면 대부분 안희정의 좌석 옆에 여성들을 앉게 했다. (…) “지사님의 기쁨조가 되고 싶어도 우린 남자라서 못 하니까 너희가 최선을 다해.” 여성 참모들에게 그런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 이런 술 문화는 조직 내에 만연했다.

116쪽
“조배죽”.
안희정 조직의 회식 자리에서 고위 참모가 종종 하던 건배사다.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뜻의 이 건배사를 모두가 웃으며 따라했지만, 의미는 뇌리에 새겨야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조직의 명을 따르지 않거나 먼저 발을 빼면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서로에게 주입하는 과정이었다.

299쪽
충남도청의 성 고충 전담 직원은 6급 주무관이었다. 안희정은 수시로 충남경찰청장과 지역 검사장들과 통화했다. 대체 누구에게 신고를 해야 해결해줄 것인가? 아무도 떠올릴 수 없었다.

이전까지 한국에서 “업무상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는 거의 사문화된 규정이었고 재판까지 끌어낸 사례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에 관련 연구도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친고죄 규정이 삭제되기 전까지 대다수 사건이 묻혀졌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을 해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규정이 형법정부초안에서 제정될 당시 엄상섭 의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을 처벌하는 규정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인 인도주의’의 일환으로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라 평가하였습니다.♦ 실무에서 입법자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해 처벌의 공백이 있어 왔던 것이,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74쪽
그곳에서 계약직의 세상을 배웠다. 당시 내가 일했던 곳의 계약직은 근무 기간이 끝나면 다른 팀과의 재계약을 통해 근로를 연장하는 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무기직이 되거나 정규직이 되어야 정상인데, 비정규직으로 순환시키며 일을 시켰다.

75쪽
그런 구조 속에서 계약 연장으로 살아남은 선배와 정규직 선배들이 해준 공통의 조언은 ‘공부’였다. 전문 학위를 따야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며 학업을 권유했다. 그 조언을 듣고 빚을 내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 나는 금융채무자이자, 병환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실질적 가장이자, 성과로 평가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264쪽
하지만 이제는 생활고에서 벗어나고 싶다. 다시 자립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직접 일해서 번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나누며 살고 싶다. 제대로 된 직장에서 다시 노동자가 되어, 일정한 수입이 생기는 삶을 기대한다.

김지은 씨가 다시 노동자가 되어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류부곤, ‘미성년자 등 간음죄에 있어서 위력의 의미’, 형사법연구 제25권 제1호 14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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