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기세가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읽기 좋은 책이 있어 잠깐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입니다. 책이 꽤 두꺼워 보이지만 각 장을 독립적으로 읽어낼 수 있게 썼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글솜씨도 무척 훌륭해서 읽는 데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마치 잘 만든 다큐멘터리 시리즈 한 편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소개글에서는 책을 조각조각 잘라 인용하겠지만, 이렇게 소개해서 좋을 책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회가 되신다면 한 장 정도는 꼭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계속 읽기
책
김지은입니다
2018년 3월 5일, 김지은 씨는 당시 충남도지사였던 안희정의 성폭력을 세상에 고발했습니다. 이 책은 그 전후 있었던 일들의 기록입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을 고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수사와 재판 절차 외에도 넘어야 할 벽이 많습니다.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 피해자를 위축시키기 위한 고소,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2차 가해 등. 이 책은 성폭력 피해를 당한 개인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례이지만,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계속 읽기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대법원 판결문에 등장한 ‘성인지 감수성’이란 표현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았습니다. 다소 길지만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양성평등기본법 제5조 제1항 참조).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피해자는 이러한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신고를 권유한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으며, 피해사실을 신고한 후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그에 관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성희롱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74702 판결—
소년을 위한 재판
모 의원이 소년법 및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난 김에 의안정보시스템에 들어가보니 소년법과 관련된 개정안이 꽤 많이 발의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인데, 과연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소년의 가장 큰 특성이라고 한다면 한창 성장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에 복귀할 것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화-교육에는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단순히 교도소에 가둬두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다른 범죄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될지 모르겠습니다). 적절한 사회화에 실패하여 오히려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마침 소년부 판사로 재직 중인 저자가 쓴 책이 있어 몇 부분 소개를 해보려고 합니다. 계속 읽기
오늘 아침에는 왠지 김현의 “증오와 폭력”을 읽고 싶었다. 당연히 집에 있겠거니 했으나 없는 걸 보면 고향집에 두고 온 모양이다. 아쉬운 대로 예전에 해둔 메모를 훑어보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 이렇게 묶어 보았다.
186쪽
“(…)사정이야 어떠했든 노인은 이 모든 일이 불결하고, 따라서 언례도 갑자기 불결해졌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리 꼼짝도 못하고 당한 처지라고 해도, 도대체 그럴 수가…… 옛날 같았으면 여자가 양잿물을 먹고 목숨을 스스로 끊었으리라.” 황노인의 사유 중에서 제일 핵심적인 곳은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이라는 곳이다. 사정이야 어떠했든 그녀는 불결하다;193쪽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이 있어서, 만인의 결속이 이뤄지는 과정은 느리고 다양하지만, 한번 이뤄지면, 그 결속의 강도는 높다. 그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피해를 적게 보고 싶다; 피해를 나눠받고 싶다라는 마음의 움직임이다.—분석과 해석, 김현—
193쪽
데이비드 리잭은 강간당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했다.“취약함은 우리를 마음 깊이 두렵게 한다. 자신의 몸이 다른 인간에 의해 강제로 꿰뚫린다는 것은 끔찍할 만큼 철저히 취약하고 무력한 느낌을 주는 경험이기에 대다수 사람은 생각만으로도 움츠러들고 만다. 그런 거부감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그 경험에, 그리고 그 일일 겪은 사람에게 감정이입한다는 것은 깊은 공감 능력과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솔직히 그런 어려운 일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 허위 신고 문제가 뿌리를 내린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최적화된 토양 때문이다. 같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강간 피해자를 피하거나 한시바삐 치워버리고 싶다는 욕구를 느낄 때, 그 여성이 모든 것을 지어냈다는 억측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다. (…)”
—강간은 강간이다, 조디 래피얼—
아픔이 길이 되려면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습니다. 글에서 글쓴이의 선함이 느껴지는 경험은 오랜만이었고요. 사회역학이라는 다소 낯선 주제지만, 그 낯섦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전문가가 쓴 전문가를 위한 책이 있을 것이고, 전문가가 쓴 일반인을 위한 책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자는 몰라도 후자가 괜찮은 책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문가는 많은 것을 알지만 일반인들이 얼마나 아는지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계속 읽기
핸드 투 마우스
빈곤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책입니다. 저자 린다 티라도는 미국 하층계급 여성 노동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층계급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하층계급이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글로써 설득력 있게 잘 알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할 겁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이 그 경계에 서있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이 책이 훌륭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