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소위 ‘수용소 문학’이라 불리는 것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묶어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분석한 책은 쉽게 찾기 어렵습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이 책에서 테렌스 데 프레는 수용소를 주제로 한 문학,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분석하고, 생존자의 속성이라 부를 만한 것을 찾아내어 생존자들의 존엄을 되찾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저자의 관점은 다소 낙관적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용소와 생존자에 대해 수많은 연구를 해온 사람이 낙관적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가 저절로 비관으로 흐르던 글을 힘겹게 틀어잡아 낙관으로 이끌려고 노력한 걸로 보입니다. 이유를 찾는다면 독자를 위해서겠지요. 이 책 군데군데에서 그런 흔적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평가절하되어 온 부분이 있습니다. 숭고한 죽음에 비하면요.

28쪽
보통 영웅주의는 죽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 반면 생존을 위한 인간의 투쟁은 그 가치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왔다. (…) 그리고 영웅은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희생정신의 상징으로 승화시켜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고귀한 환상을 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88쪽
생존자가 무시당하는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다. 19세기 중엽 이래로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우월, 정신적인 깊이, 인간의 감성과 인식을 고도로 순화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생존자는 죽음과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며, 이 투쟁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33쪽
생존자는 단순히 희생될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투쟁을 전개하며, 죽음과는 어떤 형태로든지 타협하지 않는다.

55쪽
다른 유형들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자들도 바로 사선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을 넘어가 버리지 않고 그 선상에 ‘머문다’는 것이 구별되는 점이다.

98쪽
아우슈비츠의 한 생존자는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의해 주기를 원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또 어떤 생존자는 “인간의 존엄성이 경멸과 조소를 감수해야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일어날 수 있는가를 직접적인 체험담을 통해 전 인류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다.

99쪽
따라서 살아남는다는 행위는 생존자 자신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가치를 지님에 틀림없다.

생존자들이 증언을 할 수 있는지, 증언을 할 수 있는 생존자를 진정한 증인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고갑니다. 그리고 증언이 있다는 사실, 증인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과연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은 갈립니다.

66쪽
우리는 인류가 겪어 온 고뇌를 무시해 오곤 했으며, 그것을 증언해야 할 사람들은 분명한 말을 남기지 못했다.

75쪽
“어쩌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적절한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게 아닌가 겁이 나곤 했었다.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우리는 모두들 기억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 해도, 결국은 악이 아니라 선이 승리한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 나데즈다 멘델슈탐

77쪽
무엇보다 먼저 비젤은 증인으로서의 생존자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한 세대 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우슈비츠에 속한 모든 문제는 결국 고통이다. 100만 명이나 되는 어린이의 죽음은 의미가 있든 없든 인간성이 부정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디에 증언을 한단 말인가? 그는 반문한다. “증언을 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그리고 언어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한다는 것은 혹시 잘못이 아니었을까?”

증인은 이야기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실은, ‘증언은 가능한가’보다는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한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86쪽
증인으로서의 생존자는 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지만 기피당하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진실을 듣고자 하는 욕망과 그를 무시해버리고 싶은 욕구가 서로 맞먹는 것이다.

아래의 일화는 인상적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유지시켜 주는 것은 생각보다 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들의 집합일지도 모릅니다.

123-125쪽
“그때 거기서 나는, 총살되지 않으려면,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견디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더 이상 나는 무관심에 빠져 허탈해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나는 외모를 사람답게 만드는 데 집중하기로 하였다. (…) 그 결과 어떤 여자든 세수를 할 기회가 있는데도 하지 않거나, 신발 끈 매는 것을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생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 바이스

몸을 씻는다는 것은 건강상의 이유로 씻는 것과는 별개의 형식적 의미의 행동이라도, 수용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임을 알았다. 이를 중단한 사람들은 얼마 안 가서 죽는 것이었다.

“(…) 하루도 빠짐없이 씻는 데 실패한 사람은 곧 죽는다. 이것은 철칙이었다. 그것이 내부적 쇠약에 의한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는, 틀림없는 전조였다.” – 도나트

“무엇하러 세수를 한단 말인가? (…) 그러나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저 오물투성이의 더러운 대야 속, 저 탁한 물에나마 세수를 하는 건 남아 있는 생명력의 징조이며 도덕적 생존의 한 수단이라는 것을……” – 레비

테렌스 데 프레의 다음 말로 마무리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102쪽
그 증언들이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기록들은 비인간화의 밑바닥 속에서 인간의 도덕적인 근본 존재가 시련을 헤치고 부활해 나왔다는 증거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인류의 영웅주의가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증거다.

345쪽
생존자들은 기억하거나 기록하겠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결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꼭 해야 한다’는 감정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나는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하나의 ‘비명’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어쩌면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비명인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동물들이 자기 동료들을 부르는 특수한 비명, 그렇게 해서 윤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인간의 이성을 향해 필수적인 정보를 전달해 주는 경고나 호소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값비싼 체험을 흡수함으로써, 무엇이 무서운 것이며 어떤 것을 ‘악’이라고 하는가를 배운다.

하지만 테렌스 데 프레 스스로도 이렇게 믿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래와 같은 문구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298쪽
그래서 A.알바레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단 강제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위험한 화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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