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죄에 있어 폭행·협박

폭행은 통상 최협의, 협의, 광의, 최광의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강간죄에 있어 폭행·협박은 최협의의 것을 요한다. 하지만 항상 의문이었다. 왜 하필 최협의인가? 왜 협의가 아닌가? 사람을 때리면 폭행(협의)죄로 처벌받는다. 그런데 협의의 폭행에 의한 간음은 가벌성이 없다고 봐도 좋은 것일까? 비슷한 생각에서였는지, 대법원은 강도죄에서와는 달리 “현저히 곤란하게”라는 표현으로 가벌성을 살짝 넓혀 놓긴 하였다.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 그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었는지 여부는 그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대법원 1992. 4. 14. 선고 92도259 판결, 2004. 6. 25. 선고 2004도2611 판결 등 참조).
(출처 : 대법원 2007.01.25. 선고 2006도5979 판결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위반(주거침입강간등)(인정된죄명:주거침입)·강간·공갈 [공2007.3.1.(269),392])

그리고 아래 판례의 “사정만으로(…)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언뜻 보면 가벌성을 넓힌 것처럼 보인다.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는 그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성교 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 대법원 2005. 7. 28. 선고 2005도3071 판결 참조).
(출처 : 대법원 2012.07.12. 선고 2012도4031 판결 강간 [미간행])

하지만 잘 살펴보면 “피해자가 성교 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이 있다면 ‘항거가 현저히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말과 ‘사실상’ 같다. 왜냐하면 “경위”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같은 말은 어떠한 구체적인 지침도 되지 않는데 반해(그냥 사실관계를 꼼꼼히 보라는 말에 불과하다), 위 표현들은 판사들의 판단에 있어 구체적인 지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치 구성요건해당성부터 판단한 후 위법성을 조각하는 것처럼, 일단 저런 사정이 있으면 ‘항거가 현저히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겠구나’추정한 뒤 다른 경위가 있으면 그때에서야 달리 판단해도 된다는 말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판단부터 하고 그 판단을 합리화하는, 선후가 뒤집힐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사실 이쯤 되면 무슨 곡예를 펼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형법상 강간죄에서는 단순히 “폭행 또는 협박”이라 정하고 있을 뿐, 어떠한 유형의 폭행·협박이어야 하는지는 정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대법원은 과거 명확한 명문의 근거 없이 일단 구성요건해당성을 좁혀 놓았던 것이다. 과거에는 그럴 필요성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지금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 외에는 특별한 증거를 찾기 어려워 입증이 어렵기 때문에 무고의 위험이 크다는 말이 지금도 유효한지 알 수 없다. 그런 범죄가 어디 한 둘인가. 한편 ‘입증이 어렵다’는 것이 어떤 근거가 될 수 있기는 한가. 강간죄의 형량이 과도하게 높다는 말도, 실제 형법이 특별형법들에 의해 형해화된 상황(구체적으로 보자면 형량의 인플레이션이 있는)에서 적절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사례를 따져보면, 해당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만든 것인지 “곤란”하게 만든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강간죄의 성립에 있어, 법원이 계속해서 “최협의의 폭행·협박”을 요구한다는 것은 증거가 충분한 것 같으면 해당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만든 것이라 판단하고(실제로는 “곤란”한 수준에 머물렀음에도), 애매하면 처벌하지 않을 구실을 열어두기 위함일 뿐인 것은 아닐까. 많은 법조인들도 강간죄에 있어서 폭행·협박의 정도는 최협의의 것을 요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최협의(?)의 폭행·협박(강도죄와는 달리, 항거불능을 넘어 ”현저히 곤란“한 경우까지 인정하는)”이란 묘한 개념을 계속해서 안고 가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강간죄에 있어 폭행·협박”에 대한 답글 1개

  1. 그냥 지나가다 2018-11-28 / 9:20 pm

    위정자가 범법할 가능성이 많은 건 최대한 조건을 많이 붙여서 성립되기 어렵게 만든거 아닌가 합니다. 그만큼 한국에 강간이 많다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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